구멍

김태연 개인전

2023. 12. 15 — 2024. 1. 6


글 Text
전수연

그러니까 이 글은 어떤 면에서 혹은 전체적으로 김태연의 작업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작품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결국 실패할 것이다. 부정적인 어감에도 불구하고 ‘실패’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나는 작가가 언급하지 않았거나 혹은 부정했던 부분까지 작품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전경과 배경의 역전 현상을 통해 컵 혹은 두 사람의 옆모습을 보여주는 ‘루빈의 컵(Rubin’s vase)’ 이미지처럼 그의 조각은 포함된 것과 배제된 것의 자리 바꾸기를 반복한다.

‘구멍’은 뚫어지거나 파낸 자리, 어려움을 헤쳐 나갈 방법, 허점이나 약점, 앞뒤의 논리가 맞지 않는 부분 등 여러 의미를 가지며 때론 그 의미가 상반된다. 이것은 물리적일 수도 있고 개념적일 수도 있다. 무엇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구멍’은 탈출구가 될 수도 있고 함정이 될 수도 있다. 작가는 이렇게 하나의 맥락으로 수렴되지 못하고 의미가 상충한다는 점에서 구멍에 흥미를 갖게 됐다고 한다. ‘틀’에서 벗어나 여러 변수를 상상하거나 살짝 비틀어내던 기존의 작품을 생각했을 때, 구멍에 대한 그의 관심은 매우 자연스럽다.

김태연은 규격화된 기성품을 하나의 ‘틀’로 상정해서 그것을 변형 혹은 재가공하거나 기능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혹은 그래서) 이번 전시의 흥미로운 점은 기성품이 아닌 인간의 몸에서 작업이 출발한다는 것이다. 기성품의 자리에 인간의 몸이 슬쩍 들어앉았다. 소재가 기성품에서 신체로 변화했지만, 기존의 형태를 변형하는 조형적 실험은 변함이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김태연의 작업에 있어서 기성품이 차지하던 자리를 과연 몸이 대체할 수 있는가? 기성품은 말 그대로 미리 일정한 규격대로 만들어 놓은 물건이다. 다름은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불량’ 혹은 ‘하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모두 개별적이다. 나의 몸의 특성값은 너의 몸의 특성값과 다르다. 더 나아가 몸의 특성값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우리는 그것을 ‘성장’ 혹은 ‘노화’라고 부른다. (최소한) 나는 몸을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원본, 지속적해서 변화하는 유동값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김태연은 몸을 기성품에 대체할 수 있는 하나의 견본, 개인의 특성이 고착된 고정값으로 생각한다.

기성품과 몸의 아이러니한 대치 상황은 〈기대는 방법〉에서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작업이 흥미로웠던 것은 인간의 몸이 좌대 역할을 하면서 기성품인 줄자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좌대 역할을 하는 손의 크기와 손목의 두께가 모두 다르다. 오히려 그들이 받치고 있는 줄자는 모두 같은 제품이다. ‘정형화된 좌대와 대체 불가능한 조각’의 이분법이 전복된다. 그렇다고 기성품을 신격화하는 뉘앙스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초점은 비정형화된 혹은 변형된 좌대에 있다. 김태연은 몸을 소재로 다루기는 하지만, 신체성을 염두에 둔 작업은 ‘전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조각이 몸의 의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몸은 곧 개인의 지표이며 타인과 나를 구분해 주는 지표이다. 우리는 몸을 눈에 비치는 단순한 실체로 생각하지만, 몸보다 더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대상은 없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말하는 몸의 이 복잡성으로부터 김태연의 조각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저 거리 조정만 가능할 뿐 단절은 불가능해 보인다.

작가가 의도했든 아니든 이번 인체 작업은 이전 작업에 비해 더 ‘인간적’으로 보인다. 이것은 몸의 형상이 등장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변화된 조각의 소재로 인해 발현된 것이기도 하다. 조각은 하나의 실체이기 때문에 항상 특정한 물질의 특성과 직접적으로 연계된다. 조각에서 물질은 표면이자 지지체의 역할을 한다. 회화에 있어서 안료와 캔버스 표면 그리고 캔버스의 구조는 모두 조각의 물질 하나에 통합되어 있다. 김태연은 인체 조각에 유토(기름점토)와 브론즈를 사용한다. 유토와 브론즈는 가변적이고 형성이 용이하여 조각에서 주로 사용되는 물질이다. 두 물질의 공통점은 딱 그 정도이다. 나는 오히려 두 물질의 차이점에 주목하고 싶다. 브론즈는 기후에 강하고 단단하다. 반대로 유토는 굳지 않으며 열에 의해 쉽게 부드러워진다. 인간의 몸이 극단적으로 견고한 물질과 극단적으로 무른 물질로 재현되었다. 몸은 가장 단단하고 가장 여리다. 혹은 둘 다 아니거나.

기성품에서 인간의 몸으로, 산업 재료에서 점토와 브론즈로. 이번 전시는 기존 작업의 정반대 편에 위치하는 것일까. 나는 그저 작가가 그동안 빙 돌려 말하던 것을 조금 더 직접적으로 발화하는 듯하다. 현재의 작업은 오히려 김태연의 이전 작업을 환기시킨다. 그가 어떤 도구를 사용 때, 그가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그들의 기능과 조형성이었을까. 완결된 하나의 닫힌 대상에 구멍을 만들거나 살짝 비틀어서 숨 쉴 곳을 만들어주는 것 그리고 그 구멍으로부터 또 다른 가능성을 희구하는 것. 그 대상은 사회일 수도 있고 나 자신일 수도 있다. 혹은 둘 다이거나. 앞선 문장은 수정되어야 한다. ‘기성품의 자리에 인간의 몸이 슬쩍 들어앉았다’가 아니라 ‘그동안 몸의 자리에 기성품이 슬쩍 들어앉아 있었다’고 말이다.


구멍
김태연 개인전

포스터 디자인   김린
텍스트   전수연
사진   이이령
주최, 주관   김태연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𝐖𝐚𝐲 𝐎𝐮𝐭
Taeyeon Kim

Poster Design   Lynn Kim
Text   Sooyoun Joun
Photo   LEELEE R.
Hosted by   Taeyeon Kim
Supported by   Arts Council Korea, ARKO Creative Academy